십이연기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무명 - 어리석음, 연기의 실상을 알지못하는 무지 (Ignorance of the Law of Dependent Origination).
행 - 결합하려는 욕탐 업력의 발생 (Birth of Karma (Ego) to Attach to Life).
식 - 분별 작용의 발생. 십이연기의 식은 인식을 이루는 식 자체라기보다는 '분별하려는 작용'으로 이해하는것이 옳다 (Discriminating Karma(Ego)).
명색 - 육체및 세상에 의존하여 식의이름이 생김. 의식의 발생. 혹은 분별작영에의한 사물에 이름이 발생했다고 볼수도있다 (Naming of Karma(Ego)).
육처 - 의식과 육체를 망라한 여섯가지 처소 (의식처, 안처, 이처, 비처, 설처, 신처) 의 발생 (Body and Sensory Organs).
촉 - 세상의 작용력과 육처의 접촉 발생 (Contact, Connection).
수 - 육처에서 세상의 작용력을 수입함 (Internalization of Externals).
애 - 수에 대한 갈애의 발생 (Longing, Desire, Lust).
취 - 갈애의 대상을 소유하려는 욕망의 발생 (Clinging).
유 - 대상을 유의 존재로 인식하는 또다른 무명의 발생 (Birth of New Karma (Ego)).
생 - 대상을 소유하고자 하는 자아의 존재 발생 (Birth - Successful Attachment to Body ).
노사 - 늙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아의 발생 (Aging & Death).
파거불행(破車不行) 노인불수(老人不修) - 부서진 수레는 갈 수 없고, 늙은 사람은 닦을 수 없다. 좀더 젊고 건강하고 힘있을 때 힘껏 수행하라는 말입니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디를 가든지 그곳에서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곳이 진리가 되리라”는 말이다.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심멸즉 종종법멸(心滅則 種種法滅)”이라고 하여, “우리의 이 한 마음, 즉 번뇌가 일어나면 일체 모든 현상들이 발생하게 되고, 한 마음이 사라지면 일체 모든 현상들도 동시에 다 사라져 없어진다”고 하였다.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는가. - 겸우 선사의 설명
이 화두를 몇 번을 설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어요, 여러분! 각자의 안이비서신의에 만법귀일처[萬法歸一處]가 만법출생처[萬法出生處]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눈을 떠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보면, 이것이 만법萬法 아닌가요! 눈 한 번 감으면 모든 것 없어지고 보는 견체見體로 돌아가지 않나요!. 또 눈 뜨면 다시 삼라만상이 나타나지요. 이것이 만법출생처[萬法出生處]라!. 바로 이것입니다. 얼마나 가깝습니까!
듣는 소리도 귀만 열면 온갖 소리 다 들리다가 귀만 막으면 한 소리도 없고, 본래 듣는 놈으로 돌아가니 만성귀일처[萬聲歸一處]요, 코로 온갖 냄새 다 맡다가 코만 막으면 한 냄새도 없이 냄새 맡는 그놈으로 돌아가니 만향귀일처[萬香歸一處]요, 다시 코를 열면 온갖 냄새 다 나니 만향출생처[萬香出生處]라.
먹는 것도 같아요. 먹을 때는 온갖 맛이 다 있는데 입 다물면 한 맛도 없고 맛보는 놈으로 돌아가고 음식을 씹으면 온갖 맛이 다 생기니 만미귀일처[萬味歸一處] 만미출생처[萬味出生處]라.
촉[觸]도 만촉귀일처[萬觸歸一處] 만촉출생처[萬觸出生處]입니다.
법[法]도 그래요, 한 생각 없는 일념불기처에 들어가면 한 법法도 없는 것 아닙니까! 일념불기처에 들어가면 육근六根으로 설한 만법귀일처가 일념불기처[一念不起處]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상대 경계를 따라 일어나는 것이니 만법출생처萬法出生處이며,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의 그곳이 일념불기처, 만법귀일처萬法歸一處입니다.
초전법륜경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따라서는 안되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그것은 저열하고 통속적이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이며,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여래가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중도인가?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로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참으로 이 중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바로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요, 늙음도 괴로움이요, 죽음도 괴로움이다. 슬픔, 비탄,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 절망도 괴로움이다. 좋아하지 않는 것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요,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데 오취온(五取蘊)이 바로 괴로움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集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滅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그러한 갈애가 남김없이 빛바래어 소멸함, 버림, 놓아버림, 벗어남, 집착 없음이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道聖諦]이다. 그것은 성스러운 팔정도이니,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의 성스러운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진리는 철저하게 알아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일어남의 진리는 버려졌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滅聖諦]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어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의 진리는 실현되었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나에게는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道聖諦]의 진리이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이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 의 진리는 닦아져야 한다’라는, 전에 들어보지 못한 법들에 대한 눈이 생기고, 지혜가 생기고, 통찰지가 생기고, 명지가 생기고, 광명이 생겼다.
비구들이여, 내가 이와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四聖諦]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지 못하였다면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하였다고 천인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천인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스스로 천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나 내가 이와 같이 세 가지 양상과 열두 가지 형태를 갖추어서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고 보는 것이 지극히 청정하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실현했다고 천인과 마라와 범천을 포함한 세상에서, 사문과 바라문과 천인과 사람을 포함한 무리 가운데서 스스로 천명하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나의 해탈은 확고부동하다.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며, 이제 더 이상의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는 지견(智見)이 일어났다.
세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다섯 비구는 마음이 흡족해져서 세존의 말씀을 크게 기뻐하였다.
이 설명이 설해졌을 때 꼰단냐 존자에게 ‘일어난 법은 그 무엇이든 모두 사라지게 되어있다’라는 티 없고 때 묻지 않은 법의 눈[法眼]이 생겼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법륜을 굴리시자, 땅의 신들이 한 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나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도다.’라고
땅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사대왕천의 신들도 한목소리로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나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 수 없도다.’라고
사대왕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삼십삼천의 신들이, 야마천의 신들이, 도솔천의 신들이, 화락천의 신들이, 타화자재천의 신들이, 범신천의 신들이 외쳤다. 세존께서 와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나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도다.’라고
삽십삼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야마천의 신들도 한 목소리로 외첬다…
야마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도솔천의 신들도 한 목소리로 외첬다…
도솔천의 신들의 소리를 듣고, 기쁨에 넘쳐 한 목소리로 외첬다…
기쁨에 넘쳐 외치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그 신들은 또 다른 신들에게 알리고…
기쁨에 넘쳐 외치는 신들의 소리를 듣고, 브라흐마들도 한 목소리로 외치고…
이처럼 그 찰나, 그 짧은 순간, 그 순간에 범천의 세상에 이르기까지 그 소리는 퍼져나갔다. 그리고 일만세계는 흔들렸고 강하게 요동쳤으며, 한량없는 찬란한 빛이 나타났나니 그것은 천인들의 광채를 능가하였다.
그때 세존께서는 감탄을 하셨다. “참으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다. 실로 꼰단냐는 완전하게 알았다. 이로 인해 꼰단냐는 안냐시 꼰단냐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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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몽상(顚倒夢想) - 전도(顚倒)는 바르게 보지 않고 뒤집어 보는 것이고 몽상(夢想)은 꿈이나 헛것을 현실이나 진실로 착각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에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전도몽상에서 벗어나야 비로소 부처님의 세계인 구경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뜻이다. 전도몽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삼법인(三法印)을 알고 깨우쳐야 한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 차 있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은 없으며 ‘나’라는 실체 또한 없다는 것을 체득해야 한다는 말이다. 불교에서 모든 고통의 뿌리는 바로 전도몽상이다. 고통의 시작이며 고통 그 자체이기도 하다.
소욕지족(少欲知足)은 적은 것에 만족할 줄 안다는 뜻의 사자성어입니다. 이는 욕심을 줄이고 현재 가진 것에 감사하며 만족하는 삶의 자세를 의미합니다.
불립문자(不立文字) 견성오도(見性悟道)는 선종의 핵심 사상으로, 진리는 말이나 글로 표현할 수 없으며, 직접적인 깨달음(見性)을 통해 도를 얻는다는(悟道) 것을 의미합니다.불립문자 (不立文字):"문자를 세워 말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진리는 언어나 문자로 완전히 전달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 경전이나 교리에만 의존하지 않고, 직접적인 수행과 체험을 통해 깨달음을 얻는 것을 강조합니다. 문자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문자에 집착하는 것을 경계한다는 의미입니다.결국, 불립문자는 문자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자재하게 활용하는 선의 입장을 나타냅니다. 견성오도 (見性悟道):"자신의 본성을 깨닫고 도를 얻는다"는 뜻으로, 선종의 궁극적인 목표입니다. 선종에서는 인간의 본성이 곧 부처의 성품(佛性)과 같다고 보며, 이를 깨달으면 불교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적습성성(積習成性)은 ‘대지도론’에 나오는 가르침이다. 습관이 오래되다보면 그게 바로 본성이 된다는 말이다. 습관은 좋은 습관도 있고 나쁜 습관도 있다. 다만 어떤 습관을 들이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이나 품성이 달라진다. 좋은 향을 피우면 몸에 향기가 배고, 생선과 함께 있으면 생선냄새가 몸에 배는 것과 같은 이치다.
즉심시불(卽心是佛) : 즉심즉불(卽心卽佛), 시심시불(是心是佛)과 동의어. ‘그대의 마음이 곧 부처/진리’라는 뜻. 그러므로 그대의 마음이 곧 깨달아야할 대상이라는 뜻. 마음의 실체, 마음의 움직임을 낚아채면 진리를 깨달은 것이라는 뜻. 여기서 ‘부처’란 법당에 모셔져 있는 불상을 가리키거나 인격화된 명칭이 아니라, 불교적 진리의 대명사로서 ‘부처’이다. 문제는 마음의 어떤 부분, 어떤 점을 깨달으라는 것일까? 혹 인체 가운데 마음은 어디쯤 있는지? 마음은 어떻게 생겼는지? 그런 것이 아니고, 이 말은 본래 청정한 마음(불성)을 복원시키라는 것이다. 반대로 순간의 희로애락에 흔들리는 그대의 마음, 무상한 것에 인생을 바치는 그 마음의 실체를 찾아보라는 것이다. 엉뚱한 데서 찾지 말라는 뜻이다.
안수정등(岸樹井藤) 이야기
실유불성(悉有佛性)은 불교 용어로,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대승경전인 열반경에 나오는 구절로, 모든 생명 있는 존재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즉, 중생 안에 이미 부처의 씨앗, 즉 불성이 갖춰져 있다는 것입니다.
진공모유 (眞空妙有) 공(空)을 이해함에 있어서 유의해야 할 것은, ‘공(空)’, 그것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비어있다는 말이라는 점이다. 비어있는 것과 없다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무(無)-없다」는 말은 있던 것이 없어진 것이고, ‘공(空)’은 본래부터 없는(비어 있는) 것이며, 고정된 주체(자아)가 없다는 뜻이다. 즉, ‘나’라는 실체가 없다는 말이다.중국 화엄학의 대가인 현수법장 (643~712) 스님은 진공모유에 대하여, "있으면서도 공한것을 진공 이라고 하고, 공하면서도 있는것을 모유라고 한다. 공과 유가 치우치지않고 공존해서 중도에 합한것이 진공모유다"라고 했다.
좌탈입망(坐脫立亡)
법력이 높은 고승들이 세상과 인연이 다할 때 택하는 방법으로 참선 자세로 앉아서 돌아가시거나, 혹은 서 있는 자세로 세상과 인연을 다하는 모습을 좌탈입망(坐脫立亡)이라 하며, 죽음마저도 마음대로 다룬다는 것으로 입적, 원적, 열반했다고 한다.
좌탈입망을 중시하는 이유는 마지막 죽는 순간의 의식 상태가 우주의 근본 상태를 느끼고 생사를 초월한 도를 보는 사생관 때문이다. 즉 좌탈을 했다는 것은 죽는 순간에도 각성 상태에서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고 고통과 번뇌의 원인 덩어리인 몸을 벗어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깨달음의 자리에서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다.
좌탈입망은 초기 경전에 많이 나온다. 자신의 의지대로 의식이 몸을 떠나는 것을 말한다. 원하는 시간에 이 몸을 버리고 열반에 든다. 그리고 경전에는 좌탈입망하는 방법과 원리가 자세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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